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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라 中에서 (07/10 ~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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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구의 행복비타민 3373회차

2014.07.10(목)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라 中에서

레그손 카이라는 5일치 식량과 자신의 두 보물인 『성경』과 『천로역정』, 방어용 손도끼와 담요만 가지고 인생을 건 여정에 나섰다. 그는 아프리카 남동부의 니아살랜드(1964년 말라위로 독립) 부족 마을을 출발해, 걸어서 북쪽으로 동아프리카의 황야를 가로질러 카이로로 간 다음, 그곳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때는 1958년 10월이었는데, 어머니가 레그손이 태어난 날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으므로, 당시 레그손은 열여섯 혹은 열일곱 살이었다. 그의 부모는 둘 다 문맹이었고, 미국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먼 곳인지도 알지 못했다. 부모는 레그손의 결심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아들의 여행을 축복해 주었다.
 레그손의 여행은 교육을 받아야겠다는 결심에 불을 지핀 그만의 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레그손은 자신의 영웅들처럼 되고 싶었다. 가난한 환경을 떨치고 일어나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다시 쉼 없이 싸워 노예들을 해방시킨 에이브러햄링컨. 그리고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위대한 개혁가이자 교육자가 되어 자신과 자신의 동족에게 희망과 존엄성을 선사한 부커T. 워싱턴. 이런 훌륭한 역할모델들처럼 레그손은 인류에 봉사하고 싶었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과 목표를 실현하려면 최고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 했다. 레그손은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최선의 장소가 미국임을 알고 있었다.

 레그손이 무일푼에 뱃삯을 치를 어떤 방도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잊어라. 어느 대학을 갈지, 또 그 대학이 과연 그를 받아줄지 알 수 없었다는 사실도 잊어라. 카이로는 레그손이 살던 마을로부터 무려 약 4천80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그곳으로 가려면 5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수백 개의 부족이 살고 있는 마을들을 지나야 하는데, 레그손은 그중 어떤 말도 할 줄 몰랐다는 사실도 잊어라. 당시 레그손을 둘러싸고 있던 온갖 부정적인 조건들일랑 모두 잊어라. 왜냐고? 레그손은 해내야 했으니까, 그리고 해냈으니까.
 당시 레그손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땅에 가겠다는 목표 외에는 아무것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그손이 처음부터 그렇게 의지가 강했던 것은 아니다. 어릴 적 그는 가난을 핑계 삼아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았고, 해야 할 일도 미뤄두기 일쑤였다.
“나는 가난한 아이야.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당시 마을 아이들 대부분이 그랬듯, 니아살랜드 지방 카롱가 출신의 가난한 소년 레그손에게 공부는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레그손은 선교사들이 가져온 책 더미를 구경하다가 에이브러햄 링컨과 부커T. 워싱턴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레그손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래서 카이로까지 4천800킬로미터를 걸어가겠다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가당치도 않은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험한 아프리카 땅을 꼬박 5일 동안 걸었지만, 겨우 40킬로미터 정도밖에 걷지 못했다. 준비한 식량은 벌써 떨어지고 물도 거의 바닥났으며 돈도 없었다. 이런 상태로 남은 4천760킬로미터를 계속 걸어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레그손은 고개를 떨구지 않았다. 여기서 돌아서는 것은 자신의 꿈을 포기한다는 뜻이었고, 가난과 무지의 삶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그는 자기 자신과 약속했다.
“나는 미국에 갈 때까지, 아니면 노력하다 죽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그는 계속 전진했다. 때로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걸었지만, 대부분은 혼자였다. 가다가 마을을 만나도 그곳 원주민들이 자신에게 적대적일지 우호적일지 몰라 조심스럽게 들어서야 했다. 어떤 때는 마을에서 일과 잠자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수많은 밤을 별을 보며 길거리에서 잠을 잤고, 야생 과일 등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을 찾아 연명해야 했다.
 그는 점점 야위어갔다. 열병에 걸려 심하게 앓기도 했다. 그러나 친절한 낯선 이들이 약초로 치료해 주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지치고 의기소침해진 레그손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수백 수천번을 하기도 했다. 이 어리석어 보이는 여행에 목숨을 거느니,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유혹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대신 레그손은 자신이 늘 가지고 다니는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이미 익숙한 글을 다시 읽으며, 자신의 목표에 대한 믿음을 새로이 다졌다. 그리고 계속 전진했다.
 
1960년 1월 19일, 불확실한 여행길에 오른지 15개월 만에 레그손 카이라는 이집트 카이로까지 총거리의 3분의 1인 1천600킬로미터를 걸어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 도착했다.
 그동안 레그손은 더 튼튼해졌고 생존기술도 더 많이 익힌 상태였다. 그는 6개월 동안 캄팔라에 머물면서 돈을 벌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닥치는 대로했고, 틈만 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 주린 듯 책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사진이 실린 미국 대학 안내책자를 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대학의 사진이 레그손의 눈을 사로잡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분수와 잔디밭이 아름답고, 주변으로는 고향 니아살랜드의 웅장한 봉우리들을 연상시키는 장대한 산들이 펼쳐져 있는, 위풍당당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의 건물이었다. 워싱턴주 마운트버넌에 있는 스캐짓밸리대학은 레그손의 막연해 보이는 모험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첫 이미지였다.
 그는 즉시 그 학교의 학장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입학 허가와 장학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레그손은 스캐짓 밸리대학에 입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자신의 빈약한 예산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대한 많은 대학에 편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스캐짓밸리대학의 학장이 레그손의 용기와 결의에 깊은 감동을 받아 그에게 입학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장학금은 물론 숙식을 해결해 줄 일자리까지 제공해 준 것이다. 꿈의 또 다른 한 조각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레그손의 앞길에는 아직도 많은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는 여권과 비자를 받아야 했는데, 여권을 받으려면 정부에 확증된 출생일자를 제출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비자를 받으려면 적어도 미국 왕복 항공요금 만큼의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그는 펜을 들어 어릴 적부터 자신을 지도해 준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 선교사들은 정부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해 레그손이 여권을 받을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비자를 신청하는 데 필요한 항공요금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레그손은 이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돈을 구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으며, 카이로를 향해 계속 걸었다. 그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돈으로 신발 한 켤레를 샀다. 스캐짓 밸리대학의 교문을 맨발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시 몇 개월이 지나면서 레그손의 용감한 여행에 대한 소문이 곳곳으로 퍼져갔다. 그가 무일푼에 지친 몸을 이끌고 아프리카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 도착했을 때에는, 레그손 카이라의 전설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대서양을 건너 워싱턴주의 마운트버넌에까지 전해져 있었다. 스캐짓밸리대학의 학생들은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레그손의 항공요금으로 650달러를 모금해 보내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레그손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털석 주저앉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문제가 해결됐다는 기쁨과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극도의 피로가 몰려왔던 것이다.
 1960년 12월 레그손은 마침내 스캐짓밸리대학에 도착했다. 길고 긴 여행을 시작한 지 2년도 더 지난 후였다. 그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두 권의 책, 성경과 천로역정을 가슴에 품은 채 레그손은 높이 솟은 이 대학의 교문을 자랑스럽게 통과했다.
 레그손 카이라의 도전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학문적 여정을 계속 밟은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정치학 교수이자 존경받는 작가가 되었다.

자신의 영웅인 에이브러햄 링컨과 부커T. 워싱턴과 마찬가지로, 레그손카이라는 초라한 출발을 뛰어넘어 스스로 운명을 개척했다. 그는 세상을 변화시켰고, 다른 사람이 지표로 삼아 따를 수 있는 훌륭한 등대가 되었다. 물론 그에게도 길을 잃고 헤맬 때 한 줄기 빛으로 인생의 등대 역할을 해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확고부동한 그만의 목표였다. 레그손 카이라는 사람이 어떤 조건에서 태어나든, 그 조건을 바꿀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그러기 위해 무엇이든 할 의지가 있다면, 인간에게 한계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주었다.
 
인간의 의지보다 더 강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아닌 우리라는 사명과 목표다. 해내야 한다는 의지에 앞서 해내야 하는 ‘그것’을 명확하게 정하지 않으면 수많은 역경을 극복해 가며 끝까지 행진할 수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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