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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5회] 후회없는 삶은 살기 위해 (11/13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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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없는 삶은 살기 위해

1940년 여름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했다. 그러자 폴란드에 살고 있던 많은 유태인들이 인접한 나라 리투아니아로 피난을 왔다. 그곳 역시 안전한 곳은 못되었다. 언제 독일군이 침공할지 알수 없었다. 리투아니아에 있는 각국 영사관에도 이미 철수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유태인들은 또다시 다른 나라로 탈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입국을 허락하는 비자가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비자를 발급하는 각국 영사관들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고, 접촉이 가능한 곳은 일본 영사관뿐이었다. 유태인들은 서둘러 일본 영사관으로 몰려갔다. 그곳이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일본 영사관의 스기하라 부영사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본국 정부에 문의 전보를 쳤다. 본국에서는 곧바로 회신을 보냈다. 비자를 발급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독일과 우호 관계에 있던 일본으로서는 독일의 비위를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영사관 담장 밖에서 두려움에 떨며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바라보면서 스기하라 부영사는 다시 두 차례나 본국 정부에 허락을 요청하는 전보를 쳤다. 하지만 회답은 마찬가지였다. 절대로 유태인들에게는 비자를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틀 밤을 고민하던 스기하라는 마침내 본국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한 사람의 고뇌하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저 많은 사람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영사관 문을 열고 유태인들에게 들어오게 한 스기하라는 그날 이후 리투아니에서 철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잠과 식사도 거른 채 비자를 발급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목숨을 구한 유태인 숫자는 무려 6천 명이 넘었다. 스시하라는 얼마 후 독일군을 물리치고 새로 점령해 온 소련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전쟁이 끝난 뒤 억류 상태에서 풀려난 스기하라는 곧바로 일본 정부에 복직 신청을 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의 복직을 거부했다. 중요한 전시 상황에서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개인의 판단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다시 공직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기하라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 리투아니아에서는 수도 한복판의 큰 거리를 '스기하라 거리'라고 명명했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자기 나라에 스기하라를 기념하는 공원을 만들었다. 그의 인도적인 행동 덕분에 살아남은 유태인들은 뉴욕에 모여 그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스기하라는 죽기 전에 아내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후회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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