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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살림에 남 도우려면 덜 먹고 덜 써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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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09-10-08 00:00 조회5,0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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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살림에 남 도우려면 덜 먹고 덜 써야죠"
10년 넘게 달동네 떠돌다… 1994년 임대주택 마련 후
"이제 더 어려운 이 돕자" "나머지 돈으로 생활 충분… 남으면 또 기부에 보태죠"

"김밥 두 줄 아직 멀었소?"

"여기 만두 한 접시요 잉!"

지난달 29일 낮 12시, 광주광역시 화정동 '웅이네 분식'(19㎡·6평)은 4인용 식탁 3개를 차지하고 점심을 주문하는 손님들로 장터처럼 북적거렸다.

바깥주인 이상근(58)씨가 땀 맺힌 얼굴로 연방 "갑니다"를 외치며 라면과 떡볶이를 날랐다. 안주인 김수자(56)씨는 구운 김에 따끈한 쌀밥과 달걀·소시지·단무지가 어우러진 통통한 김밥을 순식간에 말았다.

부부는 손님들에게 밥값을 받으면서 손에 동전이 들어올 때마다 카운터에 놓인 연두색 플라스틱 저금통 6개에 집어넣었다. 김씨가 씩 웃었다.

"동전이 생기면 수시로 넣어요. 연말에 형편이 어려운 애들 돕는 일에 쓰려고…. 손님 중에도 얼마씩 내고 가시는 분들이 계세요."

부부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0만원짜리 가게를 운영 중이다. 아침 8시에 문 열고 1300원짜리 김밥부터 4000원짜리 돌솥비빔밥까지 12가지 메뉴를 하루 50~60인분씩 팔고 나면 언제 해가 떨어졌는지 모르게 밤 9시가 된다. 한달 벌이 360만~390만원에서 재료 값·가게 세를 빼면 100만~140만원이 남는다. 남편은 주변 미용실을 돌며 가위를 갈아주고 한달에 20만~30만원씩 보탠다. 부부는 이 돈에서 매달 52만원씩 떼서 살림이 어려운 초·중·고교생 10명에게 보낸다. 1995년부터 15년째다.

부인 김씨가 소매가 해진 꽃무늬 셔츠에서 실밥을 뜯으며 말했다. "없는 살림에 돈을 부치려니 저희도 솔직히 아까울 때가 있지요. 매달 52만원씩 적금을 부으면 1년만 지나도 그 돈이 얼마예요. 그럴 땐 '내 집만 장만하면 남을 돕겠다'고 했던 결심을 떠올려요."

분식집을 차리기 전에 부부는 포장마차를 했다. 그전에는 광주광역시와 서울의 달동네를 전전하며 막일을 했다. 1980년 여름, 남편 이씨가 다니던 제재소를 그만두고 빨래판 공장을 차린 게 고생길의 초입이었다. 신접살림을 꾸민 단칸 사글셋방 보증금에다 적금까지 털어서 시작한 공장이 금방 망했다.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웅이네 분식’의 이상근(58)·김수자(56) 부부가 가게 앞에서 활짝 웃으며 서 있다. 부부는“손님들이 저금통에 동전 하나라도 보태줄 때면 더없이 기쁘다”고 했다./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부부는 경기도 성남으로 옮겨 도마 공장을 차렸다가 채 1년이 되기 전에 또 망했다. 아장아장 걷는 아들과 젖먹이 딸을 데리고 서울 금호동 달동네에 둥지를 틀었다. 빚내서 산 1t 트럭을 몰고 다니며 야채와 생선을 팔았지만, 장사가 안 돼 결국 트럭을 도로 팔아야 했다. 그 뒤엔 식당일·막노동·재봉일·노점상으로 닥치는 대로 일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다. 라면 하나에 쌀 한 주먹 넣고 퉁퉁 불도록 끓인 '라면죽'으로 네 식구가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부인 김씨는 "어느 날 보니 우리가 산동네에서도 맨 꼭대기 집에 살고 있었다"고 했다. "싼 월세를 찾아 위쪽만 찾다 보니까…. '이대로 살아서 뭐하나. 차라리 죽자' 했어요.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비운 사이 연탄 화덕을 방에 들여놓고 문을 잠갔지요."

김씨의 의식이 아물아물 멀어질 무렵, 옆방 사는 이웃이 잠긴 문고리를 뜯고 들어와 김씨를 흔들어 깨웠다. 놀러 나갔다 돌아온 아이들이 문을 두드리며 우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여긴 것이다.

김씨는 병원 갈 엄두도 못 내고 동치미 몇 사발로 몸을 추슬렀다. 며칠 뒤 아침, 방문 틈에 흰 봉투가 끼워져 있었다. 이름도 주소도 적히지 않은 봉투에 현금 10만원이 들어 있었다.

남편 이씨는 "이웃집 누군가가 놓고 간 것 같은데 누군지는 지금도 모른다"고 했다. "그 돈을 얼마나 소중하게 썼는지 몰라요. 이 사람(부인)이랑 둘이서 '애들 데리고 마음 놓고 살 집만 마련하면 우리도 없는 사람 돕고 살자'고 약속했어요."

부부는 1990년대 초 광주광역시로 내려왔다. 단속반이 뜰 때마다 엎어지고 깨진 식재료통을 주워담으며 부지런히 포장마차를 끌었다. 1994년 7월, 부부는 광주 신가동에 29㎡(9평)짜리 국민임대주택을 마련했다.

부부는 옛 약속을 지키기 시작했다. 집을 마련한 그 해에 부인 김씨는 경남 진주에 사는 30대 주부에게 신장을 기증했다. 단칸방에 살면서 딸(당시 10세)을 키우는 만성 신부전증 환자였다. 1995년 부부는 장남 이름을 따서 '웅이네 분식'을 차리고 수입 일부를 어린이재단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네 식구 옷은 아파트를 돌며 재활용품을 구해 입었다. 추석과 설날도 갈비와 부침개를 해먹은 기억이 없을 만큼 아끼며 살았다.

주위의 시선이 꼭 곱지는 않았다. "남 줄 돈, 자식한테나 주지"라는 사람도 있었다. 딸이 고등학생 때 동네에서 얻어온 커다란 교복을 건네자, 딸이 거울을 보고 "다른 집 애들은 도우면서 왜 나는 교복도 안 사주냐"고 울먹였다. 김씨는 "엄마로서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집 아이들은 옷 입고, 밥 먹고, 용돈도 받았어요. 많이 안 줘서 그렇지…. 애들한테도 그랬어요. 우리가 아낄 수 있으면 수중에 100원도 없는 애들한테 그 돈을 주는 게 옳다고. '하여튼 엄마 아빠 생각은 그러니까, 너희들도 대학 간 다음엔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했지요."

부부는 정말로 남매가 대학에 간 뒤 한달에 10만원씩만 부쳐줬다. 나머지는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직접 해결하게 했다. 아들(28)은 한동대를, 딸(26)은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했다. 남매는 현재 서울에서 취업준비 중이다. 아들은 "중·고등학교 때 '집에 부담되니 반장은 하지 말라'시던 부모님이 매월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한다는 사실을 알고 서운했다"고 했다.

부부는 "남들은 우리 보고 왜 힘들게 사느냐고 하지만 우리는 남 모르는 기쁨이 많다"고 했다. "우리가 도운 애 중에 포항공대 박사과정에 간 아이가 있어요. 추석날 그 애가 배 한 상자를 들고 찾아왔어요.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하는데, 아이고,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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