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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세상]70만명 거쳐간 가나안농군학교 눈물의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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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6-12 00:00 조회5,4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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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만에 터전 옮기는 '새마을운동의 모태'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 새벽 5시면 울리던 개척종 "새벽종이 울렸네" 노랫말로
한국인 '하면 된다' 정신 심어
턱없이 부족한 토지 보상금 - 보금자리지구 포함돼 옮겨야… 양평에 부지 사고 나니 끝
"건물 지을돈 없어 애가 탄다"

"난 평생 돈 버는 재주 없이 살았고, 돈 바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큰 학교를 옮기려고 보니 돈이 너무 많이 드네요. 건축비는 고사하고 터 닦는 데만 15억원이 든다고 합니다. 내 평생 처음으로 '누군가 금전적으로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새마을운동의 모태가 된 경기도 하남시 가나안농군학교. 지난 8일 오후 학교에서 만난 김평일(70) 교장은 창립 50주년을 맞아 경기도 양평으로 학교를 옮기는 소감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고(故) 김용기 장로)가 살아계실 때, 박정희 대통령이 찾아와 '내가 뭘 도와드릴까요?' 하니 아버지는 '그저 안 도와주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라며 거절했습니다. 그 정신을 잊지 않고 지키려 했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가 없네요."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산 52-2번지. 농장과 대지를 합쳐 총 4만㎡(1만2000평) 규모의 땅은 1962년부터 농군학교의 터전이었다. 번지 앞에 산(山) 자가 붙었지만 나지막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김용기 장로와 김 교장이 대를 이어 야산을 50년간 가꿔왔기 때문이다.

지난 8일 오후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가나안농군학교에서 김평일 교장이 학교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는 표지석 앞에서 학교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학교 부지가 2009년 정부 시책에 따라 보금자리주택지구에 포함돼 학교를 옮기게 됐지만, 토지 보상금이 턱없이 적었다. 산 번지인 데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던 탓이다. 경기도 양평에 새 부지로 6만6000㎡(2만평)짜리 야산을 사고 나니 남는 돈이 없었다. 그는 "지난 3월까지 땅을 비워달라고 했는데 올해 말까지로 미뤄 버티고 있다. 국가에서 하는 일이니 따르겠지만, 돈이 없어 새 부지에 교육관·농장·식당·생활관 등을 짓지 못해 도저히 못 옮긴다"고 말했다.

가나안농군학교는 1954년 고 김용기 장로가 야산을 개간해 만든 농장에서 시작됐다. 농장의 수확량이 늘자 인근 주민들과 공무원이 농사법을 배워갔다. 체계적으로 농민교육을 하기 위해 1962년 농군학교를 세웠다. 그해 박정희 대통령이 찾아와 "국민과 우리나라가 잘살게 하는 게 내 목표인데, 김 선생이 벌써 이뤘다"고 했다. 1960년대 중반 한 달간 총리실 사람들이 농군학교에 파견됐다. '하면 된다' '가난을 싸워 이겨야 한다' 등 농군학교에서 쓰던 말이 1970년 시작된 새마을운동의 구호가 됐다. 새벽 5시에 울리는 농군학교의 '개척종(鐘)'은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하는 노래가 됐다.

이후 50년간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두 딸, 박근혜·이재오 의원 등 정치인과 경제인, 연예인, 직장인, 학생 등 7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농군학교에서 3~15일간 머물며 교육을 받았다. 태국·우간다 등 외국 관리들도 찾아왔다.

김 교장은 "처음 학교를 옮겨야 한다고 했을 때 너무 화가 나 이마에 빨간 띠 두르고 청와대 앞에 갈 마음까지 먹었다"고 했다. 이후 3년간 곳곳을 찾아다니며 '역사적 장소이니 철거하지 않게 도와달라'고 탄원했지만 소용없었다. 수십년간 얼굴 보며 살던 동네 사람들도 보상금을 받고 하나 둘 떠났다. 그는 "이웃도 없이 우리만 덩그러니 남아서 뭐 하겠느냐"며 흙벽돌 쌓아 지은 학교 건물과 교회를 유적지로 남기는 조건으로 학교 터를 옮기기로 했다.

그는 "양평 시대가 열리면 제2전성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故김용기 장로의 가나안 규칙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한 고(故) 김용기<사진> 장로는 "한쪽에서 굶어 죽는데도 다른 쪽에서 낭비하는 것은 죄악"이라며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고 가르쳤다.

실제로 그는 "치약은 한 번에 3㎜ 이상 짜면 안 된다. 밥알은 단 한 톨도 남기지 마라. 세수할 때는 물을 대야의 70%만 떠서 사용해라" 등의 규칙을 만들었고, 스스로 실천했다. 또 "한 끼를 먹으려면 4시간은 일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9시까지 농장일을 했다.

김씨는 농촌 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에 아시아의 노벨상인 막사이사이상, 1973년에는 인촌문화상을 받았다. 1988년 그가 별세한 이후 방글라데시·필리핀·중국·태국 등 해외에도 농군학교가 설립됐다.
 
 
 
 
 
조선일보 감혜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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