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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김용기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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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6-13 00:00 조회18,5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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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직후인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지금의 하남시 풍산동 가나안농군학교를 찾았다. 농촌 개척의 새 바람을 일으키는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간식으로 감자와 빵이 나오자 박 의장은 무심코 빵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김용기(1908~1988) 교장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여기서는 식사 전에 꼭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자'고 외쳐야 합니다." 박 의장은 물었던 빵을 내려놓고 일행과 함께 구호를 외쳤다.

▶1966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막사이사이상 시상식이 열렸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각국 사절과 손님 1000여명이 들어찼다. 검은 정장 차림 수상자들 사이에 삼베 두루마기 입고 흰 고무신을 신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아시아 농부로는 처음 상을 받는 김용기였다. 그는 "농업을 통해 세상의 가난을 몰아내고 평화를 이루는 게 꿈"이라고 연설해 누구보다 큰 박수를 받았다.

▶김용기가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1962년 우리 1인당 국민소득은 87달러였다. 그는 아내와 아들·딸 일가족 8명의 힘으로 동부면 야산 4만㎡를 기름진 땅으로 일군 뒤 개척 경험을 나누기 위해 학교를 열었다. 그의 집엔 온돌을 비롯한 난방 시설이 전혀 없었다. 대신 벽을 한 자 넘는 두께로 쌓고, 문을 이중으로 달고, 지붕에도 흙을 두껍게 입혔다.

▶김용기는 생일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생일은 환갑 되는 해부터 사회에 공이 있는 사람만 치러주자"는 게 지론이었다. "세상에 태어난 것이 좋은 게 아니라 태어나 좋은 일을 하는 것에 탄생의 뜻이 있다"고 했다. 그는 와이셔츠 입고 넥타이 맨 적도 없다. 늘 직접 디자인한 국민복을 입었다. 1966년 10월 4일자 조선일보는 전날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열린 김용기의 차남과 장녀 합동결혼식 소식을 전했다. 신랑은 국민복, 신부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예물 대신 악수를 나눴다. 두 쌍 결혼식 비용 2만원 대부분이 하객에게 대접한 국수값이었다.

▶근면·절약·봉사의 '김용기 정신'이 서려 있는 하남 가나안농군학교가 올해 말 사라질 운명이라고 한다. 이 일대가 보금자리주택 지구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토지 보상금으로 양평 야산에 새 터를 사고 나니 남는 돈이 없다고 한다. 50년 동안 가나안농군학교를 거쳐간 입소생이 70만명. '김용기 정신'은 이들을 통해 온 사회로 퍼져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우는 큰 힘이 됐다. 시절이 바뀌고 먹고살 만해지면서 가나안농군학교를 찾는 발길도 뜸해지고 있다. 개척자 김용기에 대한 기억도 머지않아 사람들 머릿속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김태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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